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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산(1) - 선암사/송광사/불일암

산과 여행/전라도

by 여정(旅程) 2011. 12. 15.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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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일자 : 2011. 12. 12

 

선암사(仙巖寺)

선암사는 호남의 명산 조계산에 자리잡은 한국적인 사찰의 옛모습이 가장 잘 보존된 천년고찰이다

백제성왕 5년인(527)년 현재의 비로암지에  아도화상(阿度和尙)께서 선암사를 창건하였고, 산명을 청량산(淸凉山)

사찰명을 해천사(海川寺)라 하였다

정유재란 때에 화재로 큰 피해를 입은 이래 7차에걸친  중창을 거듭하다 도선국사와 대각국사때의 기틀을

유지하고 1992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사찰복원 정비가 진행중인 상태다

현재 선암사는 태고종 유일의 총림인 태고총림으로써 수많은 스님들이 수행정진하는 종합수도도량의 역활을

이어가고 있다

암사 가람의 또 하나의 특징은 삼무(三無)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는 다른 사찰과 다르게 선암사에는 사천왕문이 없다. 그 이유는 조계산의 주봉이 장군봉이라 장군이 지켜주기 때문에 불법의 호법신인 사천왕상을 구지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둘째는 협시보살상이 없다는 것이다. 대웅전 석가모니부처님은 항마촉지인을 하고 계시다. 탐진치 삼독을 멸하시고 마구니에게 항복받으셨으며 항마촉지인을 하고계셔서 협시보살상을 두지 않았다.
셋째는 어간문이 없다 는것인데 어간문이란 대웅전의 정중앙에 있는 문으로 다른 사찰에는 정중앙의 문에도 사람이 출입이 가능하지만 선암사에는 부처님처럼 깨달은 분만이 이 어간문을 통하여 통과할 수 있다고 하여 어간문을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선암사 홈페이지)

 

 

 


 

 

호남센트럴파크에서 심야버스를 타고 또다시 홀로산행에 나선다

순천터미널에 도착하니 아직 주위는  어둑어둑 신새벽이다

쌀쌀한 역사의 한기를 견디면서  선암사행(1번) 시내버스 6시 첫차를 기다린다

 이른아침 낯선 시내에 나서니 정류장 방향도 모르고..

거리엔 사람도 뜸하고 겨우 행인에게 물어 1번 버스에 오른다 

이른시간이라 승객이 없는 버스는 정류장을 그냥 지나쳐 가니

생각보다 빨리 종점인 선암사에 도착한다(50분소요)

몇해전 차로 들어간곳이라 막상 동트기전에 버스에서 내리니

어디가어딘지 분간이 가질 않는다

버스종점에서 선암사까지 걸어가는 거리가 짧지는 않다

 

어둠속에서 혼자 걷는일은 하지말아야겠단 생각을 하며 가급적 천천히 걸으며 날이 밝기만을 기다려본다

더듬거리며 걷다보니 서서히 주위가 밝아오지만 아침 공기가 여간 서늘한게 아니다

신록의 계절에 걷던 선암사의 기억과는 사뭇 다른 추위와 정적만이 감돈다

 

 

 

 

 

 

 

 

승선교(보물 400)

선암사의 부도(浮屠)를 지나 경내에 이르면 시냇물을 건너야 되는데 그 건널목에 놓인 다리가 승선교이다.

시냇물의 너비가 넓은 편이라서 다리의 규모도 큰 편인데, 커다란 무지개 모양으로 아름답게 놓여있다.

기단부(基壇部)는 자연 암반이 깔려 있어 홍수에도 다리가 급류에 휩쓸릴 염려가 없는 견고한 자연 기초를 이루고 있다.

다리의 아래부분부터는 길게 다듬은 돌을 연결하여 무지개 모양의 홍예(虹霓)를 쌓았으며,

그 짜임새가 정교하여 밑에서 올려다보면 부드럽게 조각된 둥근 천장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홍예를 중심으로 양쪽 시냇가와의 사이는 자연석을 쌓아 석벽을 이루고 그 윗부분에도 돌을 쌓았는데,

모두 주변의 냇돌을 이용하였다.

다리 한복판에는 용머리를 조각한 돌이 밑으로 삐죽 나와 있어 장식적 효과를 주고 있는데,

예로부터 이것을 뽑아내면 다리가 무너진다고 전해오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불에 타서 무너진 선암사를 중건할 때 이 다리를 놓은 것으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조선 숙종 24년(1698) 호암대사가 관음보살의 모습을 보기 바라며 백일기도를 하였지만 그 기도가 헛되자 낙심하여 벼랑에서 몸을 던지려 하는데,

이 때 한 여인이 나타나 대사를 구하고 사라졌다.

대사는 자기를 구해주고 사라진 여인이 관음보살임을 깨닫고 원통전을 세워 관음보살을 모시는 한편,

절 입구에 아름다운 무지개다리를 세웠다고 한다. 무지개 모양으로 건설한 양식은 곧 보성 벌교 홍교(보물 제304호)와 같은데,

2개가 모두 지역적으로 가까운 곳에 있으므로 양식상 공통점이 있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다만 돌을 쓴 방식이나 마무리수법이 오래된 양식이며, 그 구조 또한 보다 웅장한 느낌을 주는 것으로 미루어

영조 때에 만들어진 벌교홍교보다 먼저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문화재청 자료)

 

 

 

 

 

위의 승선교는 처음 세워진후 290년이 지난 2003년에 이를 해체하여 자연 암반부에 석재를 보충하는 대대적인 수리를 하였다고 한다

승선교를 구성하던 147개의 홍예석(아치석)중 노후부식등으로 강도가 저하되어 재사용이 불가능한

석재 30개를 전시해 놓은것이다

 

 

 

승선교 너머로 보이던 강선루

 

 

 

삼인당

신라 경문왕2년(862) 도선국사가 만든 연못이다

  삼인이란 제행무상인(諸行無常印), 제법무아인(諸法無我印), 열반적정인(涅槃寂靜印)

삼법인을 뜻하는 것으로 불교의 중심사상을 나타낸 것이다.
추석을 전후한 시기에 가면 가운데 알처럼 생긴곳에 붉은 꽃무릇이 핀 모습을 볼수 있다고 한다

                          .

            

 

 

 

 

 

 

 

 

 

선암사 일주문

 

 

 

일주문 앞에 서있는 고사목의 잔해지만 나름대로 무슨 의미가 깃들어 있는듯하여

잠시 상상의 나래를 펴면서 발길이 머문곳이다

 

 

 

글귀는 좋지만 경내에 수많은 연등이 철재물에 매달려 있으니 고색창연한 절 분위기는 반감된다

 

 

 

 

선암사의 명물 중의 하나,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뒤깐이다. 전라남도 문화재자료(214) 로 지정되어 있을 정도인데,

정식 명칭은 순천선암사측간(順天仙巖寺厠間)이다. 일주문과 범종루를 지나 대각암 가는 길에 있는 해천당 옆에 위치해 있다.

 

이 건물은 앞면 6·옆면 4칸 규모로, 지붕 옆면이 사람 인()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며 바람을 막을 수 있는 풍판으로 처리되었다.

()자 모양의 평면을 구성하고 있는 이 건물은 북쪽에서 출입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남자와 여자가 사용하는 칸이 양옆으로 분리되어 있어 재래식 화장실에서는 보기 드문 구성을 하고 있다.

 

 

측간(뒤깐)

 

 

 

 

선암사에 오는 객승이나 신도들이 묶는 곳으로 돌담을 끼고 돌아가면 편백나무숲로 이어진다

해천당

 

 

 

 

 

 

처진올벚나무(좌)를 보느라 와송(우)은 뒷전이었으니...

정호승의 시 속에 등장하는 등굽은 소나무가 이 와송이었을까

 

 

 

 

 

 

 

 

 

 

 

 

 

 

 

 

 

 

 

좌측으로 올라갈 장군봉이 보인다

 

 

 

선암사의 매화는 수령이 오래된 것들이 많아 봄이면 선암매를 보기 위해서라도 이곳을 찾아온다고 한다

돌담길을 따라 50여그루가 피어있는데 600여년전에 와송과 함께 심어진 것이라 전한다

 

 

 

매화가 만발하는 봄철에 이곳을 걸어가는 기분을 상상하니 봄을 기다리는 이유가 하나 더 생긴다

 

 

 

 

 

 

 

 

 

 

 

 

 

 

 

 

 

 

 

절집사이로 아침해가 떠오른다

선암사에서 맞는 일출의 풍광을 저렇게밖에 담지 못함이 아쉬울뿐이다

 

 

 

 

 

 

 

 

 

 

 

 

 

대웅전앞의 삼층석탑은 연등으로 인해 조화를 잃었지만

부처님이 모셔진 대웅전은 활짝 개방되어 이방인의 낯선 기웃거림을 흔쾌히 허락하는듯하다

신자도 아니지만 이른아침부터 절마당을 자유롭게 휘젓고 다니는 폼새가 왠지 불경스런것은 아닌가해서

복전함에 시주를 하고 절을 올렸다

 

 

 

 

 

 

 

 

 

 

새벽어둠속에서 시작된 선암사 탐방길이 끝나고 이제 조계산으로 들어가봐야겠다

주위가 환해지니 발걸음이 한층 가벼워지긴했지만 사람 없는 겨울 산길이 좋기만한것은 아닌듯하다

 

대각암을 거쳐 송광사로 가는 등산로 표시

 

 

 

송광사(松廣寺)

신라말 혜린(慧璘)선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창건 당시의 이름은 송광산 길상사(吉祥寺)였으며 100여 칸쯤 되는 절로 30, 40명의 스님들이 살 수 있는 그리 크지않은 규모의 절이었다고 한다.

그 뒤 고려 인종때 석조(釋照)대사께서 절을 크게 확장하려는 원을 세우고 준비하던 중 타계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50여년 동안 버려지고 페허화된 길상사가 중창되고 한국불교의 중심으로 각광받게 된 것은

불일 보조국사 지눌스님의 정혜결사가 이곳으로 옮겨지면서 부터이다.
지눌스님은 9년 동안의(명종 27년1197년 ~ 희종 원년) 중창불사로 절의 면모를 일신하고 정혜결사운동에 동참하는 수많은 대중을 지도하여

한국불교의 새로운 전통을 확립하였다.
이 때부터 송광사가 한국불교의 중심으로 각광받기 시작하였다.

그 동안 정유재란, 6.25사변 등 숱한 재난을 겪었으나 지속적인 중창불사로 지금의 위용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송광사 홈페이지)

 

송광사 3대 명물1. 비사리구시    2. 쌍향나무    3. 능견난사(부처님께 공양물을 올릴때 사용하던 용기,송광사 박물관에 전시)

 

 

 

 

 

 

 

스님들의 수행처

 

 

 

 

 

 

 

 

 

 

'시내를 베고 누워있다'의 뜻을 가진 이곳은 스님들의 학습공간이다

침계루

 

 

 

 

 

임경당

 

 

 

 

 

 

 

 

 

 

 

 

 

송광사 대웅전 앞마당은 넓음에도 불구하고 석탑이나 다른 석조물 하나 없이 단조롭다

송광사 내에 있는 건물로는 한국전쟁전에는 80여개였던것이 현재는 50여개의 전각들만 남아있다

얼마나 웅장한 규모의 큰 사찰인지 짐작이 간다

대웅전

 

 

 

대웅전의 측면은 다른 절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형태의 지붕을 보게된다

오랜 고찰이지만 대웅전의 색감으로 봐서 새롭게 단장을 한지는 오래되지 않은듯하다

 

 

 

 

 

 

 

 

약사전과 영산전

 

 

 

 

 

비사리구시가 측면에 놓여진 승보전

 

 

 

 

 

 

 

 

 

 

 

 

 

 

 

 

비사리구시란 1742년 남원 세전골에서 태풍으로 쓰러진 싸리나무를 이용해 만든 그릇이다

당시 대중의 밥을 담아 두는 데 사용했는데 쌀 7가마 분(4,000명 분)의 밥을 담을 수 있다고 한다.

비사리구시는 천왕문 안에 있기 때문에 송광사를 찾은 사람이라면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비사리구시 

 

 

 

아담한 정원을 갖춘듯한 관음전은 오래된 절집의 느낌이 드는 풍광이 아름다운 곳이다

 

 

 

오죽

 

 

무무문

 

 

 

 

 

 

 

 

 

 

 

 

 

능허교와 우화각의 아름다운 조화

 

 

 

송광사 일주문

 

 

 

불일암은 송광사 매표소를 지나 좌측으로 가는길로 가는 것이 거리상으로 짧다

송광사를 돌아보고 이쪽으로 가려니 중간에 감로암, 광원암을 거쳐 가야하기에 많이 걷는다는 느낌이든다

산행을 한끝이라 더 그렇게 길게 느껴졌을것이지만

송광사 관음전 뒤편으로 금방 나올것 같았던 불일암을 찾아 가는길은 그리 수월치가 않다

그런데 가는길이 호젓해서 사찰이나 부속암자만을 찾아가는 사람들에겐 산책삼아 부담없이 가도 좋을길이다

 

감로암,광원암,불일암 가는길

 

 

 

 

 

 

 

 

 

 

몸통 전체를 보면 고사목 같은데 어디서 영양분을 공급받는것인지 가지 하나가 살아서 초록잎을 달고 있다

 

 

 

감로암

 

 

 

원감국사비

 

 

 

감로암에서 보는 조계산

 

 

 

 

불일암(佛日庵)

법정스님이 머물던곳, 불일암 

 

법정 스님은 2010년 3월 11일 오후 1시 51분 성북동 길상사에서 마침내 시간과 공간을 버렸다. 세수 78세, 법랍 55세.

"장례식을 하지 마라. 수의도 짜지 마라. 평소 입던 무명옷을 입혀라.

관도 짜지 마라. 강원도 오두막의 대나무 평상 위에 내 몸을 놓고 다비 해라.

사리도 찾지 마라. 남은 재는 오두막 뜰의 꽃밭에 뿌려라."

'무소유'를 설파해온 법정 스님의 마지막 유언이다. 

다비준비위 대변인 진화 스님은

 “10일 밤 법정 스님이 ‘모든 분께 감사한다.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 있다면 모두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했다.

 

법정 스님은 1932년 전남 해남군에서 태어나 전남대 상과대 3년을 수료한 뒤

22세 때인 1954년 경남 통영시 미래사에서 효봉(曉峰) 스님을 만나 출가했다. 1959년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慈雲 스님을 계사(戒師계를 주는 스님)로 비구계를 받았다.

 

스님은 경남 합천군 해인사, 경남 하동군 쌍계사, 송광사 등에서 修禪安居했다.

불교신문 편집국장과 송광사 수련원장 등 종단 소임을 몇 차례 맡았을 뿐 수행자로서 본분에

 충실했다. 1994∼2003년 시민모임 ‘맑고 향기롭게’ 회주(會主모임이나 법회를 이끄는 사람)와

 1997∼2003년 서울 길상사 회주를 지냈다.

 스님이 머물던 곳 중 대표적인 장소가 1975년부터 1992년까지 머물었던 송광사 불일암이다. 스님은 강원도 평창 모처로 옮기기 전까지 '무소유(1976)'등 많은 저서를  이곳에서 집필했다.(다음카페'구미불교포교사회'발췌)

 

 

 

 

 

감로암, 광원암을 지나 불일암이 가까워졌는지 법정스님의 글귀가 보인다

매표소입구에서부터 왔으면 단박에 왔을길을 한참이나 돌아온셈이다

평소 자주 봤던 법정스님의 글귀에 절로 발길이 멈춰선다

 

 

 

 

 

 

 

 

편백나무숲길은 이내 대나무숲길로 이어지고...

 

 

 

 

 

 

대나무로 만든 암자의 작은 사립문이 반쯤 열려있다

 

 

 

 

 

 

 

스님이 거처하신 암자 한쪽으로 나무의자가 놓여있고 반듯하게 놓인 흰고무신 한켤레가

그자체로서 '묵언'으로 이끈다

 

 

 

 

손수 만든 일명'빠삐용의자'에는 남기고 싶은 말을 적으라는 수첩과 책갈피가 있고 옆으로 사탕바구니가 놓여져있다

액자에는 생전의 법정스님이 이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 담겨져있다

나도 그 수첩에 몇자 글을 적어 이곳에 온 자취를 남겨뒀다

 

 

 

 

불일암 뒤편의 부도탑

 

 

 

 불일암의 아담한 마당은 무소유 정신에 대한 평소 스님의 생각처럼

자신의 생각을 몸으로 실천하면서 살다간 스님의 간결한 삶이 느껴진다

마당에 직접 심은 후박나무아래 스님의 유골이 묻혀있다는건 불일암을 다녀와서 안일이었다

 

 

 

 

 

법정스님이 쓰시던 샤워장

 

 

 

불일암을 돌아나오면서 마음에 담아둔 글귀이다

2011년 한해를 보내면서 혼자 생각해낸 여행인 만큼 어느때보다 '아름다운 마무리'란 글귀가

가슴에 와닿는다

 

 

이번 순천여행은 왁자한 송년모임대신 홀로 여행하면서 나만의 송년의례를 갖고자함이었다

딱히 무엇을 내려놓고 비울것인가를 알지못하는 미력한 중생이지만

산행 해오면서 마음에 둔 산사를 찾아가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리란 생각을 했다

그래서 이번엔 산행에 중점을 두기보단 산행시간에 쫒겨 미처 못보고 온 것들을

떠올리며 여행지를 잡았다

이번에도 역시 몇가지 빠뜨리고 못본것이 있었지만 다음에 다시 더 좋은 구경을 위해 남겨둔것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진다

 

 

                                                                                                      조계산(2)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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